테드 창,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 주기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 주기 /  영어판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 주기

휴고 상, 로커스 상 중편 부문 최우수상 수상작. 작가 테드 창은 SF 속 인공지능 로봇과 현실 속 기술의 발전 양상에 괴리를 느꼈다. 이 소설은 그가 느낀 괴리감을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현실에서 실현 가능한 인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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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드 창,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 주기

 

심즈2 게임 플레이 화면

 종종 심즈라는 게임을 합니다. 심즈라는 게임은 독특하게도, '심'이라는 캐릭터가 플레이어의 단순한 아바타 그 이상입니다.  플레이어는 심들을 조종할 수도 있고, 명령을 내릴 수도 있지만, 한계가 있습니다. 심들은 제각기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어서, 플레이어의 명령을 거부하기도 합니다. 또 일정시간이 지나면 늙어 죽기도 합니다. 사람처럼. 플레이어는 오랜 시간 공들여 플레이 했던 심이 늙어 죽거나, 병들어 죽게되면 상실감을 겪습니다. 저장된 내용을 로딩해서 다시 살려낼 수 있긴 하지만, 그래도 언젠가는 죽게 됩니다. 치트키를 사용해서 시스템을 속이지 않는 한 결국 그렇게 됩니다.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 주기>는 꽤 독특한 SF소설입니다. 주인공 애나는 동물원 사육사로 일하다가 동물원이 폐쇄되면서 직장을 잃었습니다. 친구로부터 블루감마사의 디지언트(가상세계에서 사는 디지털 생명체)개발에 참여하라는 제안을 받고 애나는 게임회사에 들어가 졸지에 디지언트들의 훈육을 담당하게 됩니다. 애나는 사육사로서의 경험과 전문성을 뜻밖의 곳(가상 세계)에서 발휘하게 되지만, 점차 애나는 그녀의 디지언트들에게도 애정을 가지게 됩니다. 게임이 시판된 이후, 더이상 훈육이 필요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자신의 디지언트들을 계속 키우는데, 이 육아는 십수년이 지나, 블루감마사가 폐업을 하고, 디지언트들이 활동하는 데이터어스라는 가상세계가 사라지는 순간에도 계속됩니다. 애나는 '잭스'라고 이름붙인 자신의 디지언트를 거의 자신의 아이처럼 양육합니다. 그리고 '잭스'가 생존(?)할 수 있는 환경, 즉 데이터어스가 사라지게 되자, 애나는 '잭스'를 지키기 위해서 자기희생까지 할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생물학적으로 ​실존하지 않는 가상의 인공지능 생명체를 과연 사랑할 수 있을까요?

​​사람들은 제각기 관계를 맺고 살아가지만, 그 관계를 꼭 실체가 있는 누군과와 맺는 것은 아닙니다. 팬덤을 생각해보자. 스타트렉의 광팬들은 실제로 스팍과 커크가 존재하는지에 대해서는 아무 관심이 없습니다. 그들이 허구라는 것과는 무관하게 그들은 수십년간 스타트렉에 대해 집요한 관심을 가지고 하나의 세계를 창조해왔습니다.

영화 AI의 한 장면

스필버그의 영화 AI에서는 데이빗이라는 로봇 소년이 등장합니다. 여자는 데이빗을 아이처럼 아끼고 사랑하지만, 결국 자신의 아이를 대신하진 못하고 여자는 데이빗을 결국 숲속에 버리고 맙니다. 하지만, 여자가 로봇 소년을 반품하지 않고 숲 속에 버린건 데이빗이 폐기될까 두려웠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소년은 프로그래밍된 대로 아주 오랜시간이 지난 뒤 인류가 사라진 뒤에도 자신을 버린 여자를 찾아다닙니다.

 

 

 

작가는 자신의 창작노트에서 이 작품의 집필 동기에 대해 꽤 길게 늘어 놓았습니다.

■ 이것이야말로 내가 정말로 쓰고 싶었던 부분이었다. 인간과 인공지능 사이에서 생겨날 수 있는 종류의 감정적 관계 말이다. 관계란 관계를 맺은 상대방이 독자적인 욕구를 느낄 수 있는 경우에만 비로소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있는 법이다. 애완동물을 키우다가도 귀찮아지면 완전히 무시하는 사람들이 있고, 자기 아이인데도 최소한의 보살핌만으로 때우려는 부모들도 있다. 처음으로 한 번 싸우자마자 헤어지는 연인들도 있다. 이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된 특징은 이들이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할 생각이 없다는 점이다. 상대가 애완동물이든 자기 아이든 연인이든, 진정한 관계를 유지하고 싶다면 다른 사람의 욕구와 자기 자신의 욕구 사이에서 균형을 맞출 의사가 있어야 한다. 204

 

​오타쿠라고 불리면서 가상의 존재에 대해 지나친 애정을 가지는 사람들에 대한 비난은 차고 넘칩니다. 사실 그 가상의 존재는 테드 창이 말하는 것처럼 대개의 경우 "독자적인 욕구"를 느낄 수 있는 독립된 존재가 아니라 그저 사물에 불과합니다. 이것을 '관계'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가상의 존재이면서도 '독자적인 욕구'를 지닌 인공지능을 가진 존재라면? 그렇다면 '관계'가 성립할 수 있을까요?

 

영화 HER에서 남자는 연인 역할을 하도록 프로그래밍 된 AI와 사랑에 빠집니다. 인공지능은 남자의 욕구를 맞춰주기보다는 자신의 욕구를 표현하고 남자와 소통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남자는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이 사람이 아닌 인공지능 프로그램이라는 사실로 인해 괴로워하지만,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을 미화하거나, 인간화하지 않으면서 인공지능 그 자체로 받아들이고자 애씁니다. 이 둘의 모습은 '관계'라고 할 수 있을까요? 

 

영화 HER의 한 장면

가상의 존재이든 아니든, 인간은 관계에서 어려움을 겪습니다. 늘 연민, 공감 분야에서 낮은 평점을 받는 사람들은 더 어렵습니다. 대개의 경우 있지도 않은 애정과 관심을 가장해야 관계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애정이 넘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어려움을 겪습니다. 그들의 관계 내부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결국 페르소나들의 네트워크에 지나지 않는 듯합니다. 을은 갑에게 좋은 사람이지만, 병에게는 이기적인 사람입니다. 나는 내 어머니에게는 착한 딸이지만, 직장동료에게는 냉소적인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손에 열 개의 카드를 쥐고서 테이블에 앉는 사람에 따라서 다른 카드를 내어보입니다. 하지만 그 카드를 쥐고 있는 사람이 가면을 쓰고 있다고 해서, 그 관계까지 거짓은 아닙니다. 테이블에 앉았다는 것은 결국 관계를 유지하고 싶다는 의지의 일부이니까요. 

 

작가는 어린왕자와 여우와 장미를 비롯한 모든 유기체들이 어려워한 문제, 즉 '관계 맺기'를 '가상의 존재'에게 실험하고 있습니다. 인공지능이라는 것이 실현가능한지 여부를 떠나 사람은 사랑없이는 살 수 없다는 진리를 반복합니다. 커뮤니케이션 네트워크는 점점 폭넓어지는데 반해 왜 개인은 여전히 고립되는 걸까요? 소통 수단보다는 본질적인 문제에서 멀리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관계맺기는 쉬워졌지만 그 관계를 유지하기는 점점 어려워지는 것 같습니다. 

 

 에밀 아자르의 소설 <자기앞의 생>에서 주인공 모모는 하밀 할아버지에게 묻습니다. 사람이 사랑없이 살 수 있나고. 할아버지는 훗날 모모에게 말합니다.

 

"모하메드야, 사람은 사랑없이는 살 수 없단다." 

 

만약 모모가 나에게 같은 질문을 했다면 내 대답은 달랐을 겁니다.

사람은 사랑없이도 살아갈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매우 불편할 것이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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